책을 읽어봅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나서

열해 2020. 11. 7. 20:36
반응형

레오 톨스토이

 

 

책 소개

 

작가: 레오 톨스토이 (1828~1910)

언어: 러시아어

원제: Smert Ivana Ilyitsha

발행연도: 1884년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톨스토이의 대표적인 단편소설로 지금 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 소설입니다. 주인공 이반 일리치를 통한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을 둘러싼 주변인들의 반응을 그려내고 있는 소설입니다. 

 

이반 일리치는 야심 있는 인물로 자신의 진급을 위해 노력하는 인물입니다. 상류사회로의 진입을 꿈꾸며 열심히 일을 하는 인물이죠. 성공을 위해 노력하던 중, 이반 일리치는 치료할 수 없는 부상을 입게 되고 그의 증세는 점점 악화되어 갑니다. 점점 죽음으로 향하게 됩니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 그는 수많은 고뇌와 생각들에 시달리게 되고 지난날들을 돌아봅니다. 과연 잘 살아온 날들이었는지,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며 괴로워합니다. 그는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죽기 전 자신의 삶에 대해 깨달음을 얻고 죽음을 받아들이며 책은 마무리됩니다. 

 

 

 

 

죽음과 죽음을 둘러싼 이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도입부는 이반의 죽음을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와 절친했던 동료들이 그의 부고 소식을 신문에서 접하게 됩니다. 이들은 이반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입니다. 오히려 그의 공석을 누가 차지하게 될 것인가에 더 관심을 갖습니다. 

 

표트르 이바노비치는 이반 일리치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입니다. 그러나 표트르 이바노비치는 이반의 장례식에 가야 하는 것을 매우 귀찮게 여깁니다. 표트르 이바노비치는 어쩔 수 없이 이반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고 그곳에서 그의 동료를 만납니다. 그의 동료는 빨리 장례식을 빠져나와 카드놀이를 하러 가자가고 이바노비치에게 말합니다. 이반의 죽음을 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미망인이 기다렸다는듯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진즉 그와 의논하고 싶었던 자신의 용건을 꺼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남편이 사망한 경우 어떻게 하면 국가로부터 얼마간의 지원금이라도 받을 수 있는가에 관한 질문들이었다. 

 

 

표트르 이바노비치는 이반의 장례식에서 그의 부인 프라스코비야 표도로브나의 부탁을 받고 그녀와 단둘이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녀는 이바노비치에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정부에게 얼마만큼의 돈을 얻어낼 수 있는지 물어봅니다. 표트르 이바노비치는 난감해하며 자신은 잘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그의 부인인 프라스코비야 표도로브나에게조차 슬픔의 대상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계를 걱정해야 되는, 자신의 안위를 더 걱정해야 하는 상황으로 인식될 뿐입니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주변에도 이런 모습들이 많습니다. 가족의 죽음이 슬픔과 애도의 대상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이익이 될까를 따져보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극적인 예시이긴 하지만 떠오른 이야기가 있어서 이곳에 적어보겠습니다.

 

최근 방영되었던 <유키즈온더블럭>이라는 프로그램에 나온 내용입니다. 자살, 고독사, 범죄현장의 뒷수습을 주로 하시는 청소업체분께서 나와 인터뷰를 하셨습니다. 이 인터뷰하시는 분이 하신 말씀 중에, "돌아가신 자리를 이부자리로 덮어버린 다음에 신발을 신은 채로 들어와서 집을 뒤지는 것죠"라고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돈이 될 것이 있나 뒤져보는 것이죠. 죽은 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그저 '돈'에만 관심을 갖는 것이 이반 일리치의 부인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으로 애석하고 화가나는 상황에 영상을 보면서도 참 많은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죽음과 거짓 

 

이반 일리치의 병세가 심각해 질수록, 그는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병들어 갑니다. 아파지는 만큼 그는 예민해지고, 이런 그를 주변 사람들은 불편해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반 일리치를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거짓'입니다. 

 

 

이반 일리치를 가장 견디기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거짓이었다. 무슨 까닭에선지 모두가 공인한 거짓, 그는 병을 앓고 있을 뿐이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마음을 편히 가지고 치료만 잘 받으면 당연히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그 거짓을 견뎌내기가 그에게는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이반 일리치의 주변 사람들은 그의 병을 외면합니다. 그의 병이 점점 심해져 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척합니다. 자신의 마음이 불편해질까봐 이반 일리치의 병을 외면하는 것이죠. 이러한 사실을 이반 일리치는 견디지 못합니다. 또한 자기 자신도 이러한 사실을 외면한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자신의 거짓에 대해서도 괴로워합니다. 애써 자신이 회복될 거란 희망적인 사실을 마음속으로 품어보지만, 이내 이 '거짓'이 자신을 짓눌러옵니다. 

 

 

그는 자신의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죽음의 의식이 자신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의해서, 그가 평생을 두고 지켜온 바로 그 '고상함'에 의해서, 우연하게 발생한 하나의 불쾌한 사건으로, (마치 사방에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거실로 들어오는 사람을 다루는 것처럼) 꽤나 거북살스러운 일의 수준으로 형편없이 끌어내려지는 것을 보았다.

 

 

이반 일리치가 아프다는 사실, 그리고 죽어간다는 사실이 왜 주변사람들에게 불쾌한 일이 되는 것일까요? 이들이 지켜야 되는 고상함이란 또 무엇일까요? 사실 책을 읽으면서 깊게 생각해본 부분이면서 답을 찾기 힘든 부분이었습니다. 자신의 가족이자 친구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 '고상함'이란 무엇일까. '무엇이길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불쾌해지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을 하다가, 어쩌면 가족, 친구라는 관계도 이 '고상함'을 위해서 존재하는 하나의 도구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보다도 중요한 '체면'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고상함'이란 가면속에 숨겨진 진실은 이반 일리치를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반 일리치는 죽음에 다가가는 그 순간까지도 이 진실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합니다. '고상함'이란 이처럼 무서운 것이죠. 

 

 

 

 

죽음과 위로

 

고통속에서 죽어가는 이반 일리치에게 위로가 되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의 하인인 게라심과 아들인 바샤입니다. 젊고 건장한 게라심은 순박한 시골 청년입니다. 그는 이반 일리치의 요구를 아무 불평 없이 해내는 듬직한 인물입니다. 또한 게라심에게는 '고상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진실된 모습으로 이반 일리치를 대합니다. 또한 죽음에 대해서도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진 건강, 힘, 삶의 활기는 모두 이반 일리치에게 상처가 되었지만, 게라심이 가진 삶의 활기만큼은 이반 일리치를 상심에 빠뜨리는 대신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아들 바샤는 김나지움에 다니는 학생입니다.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존재로, 게라심과 비슷하게 순진하고 진실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아픔과 죽음에 대해 진심으로 아파하며 아버지를 위로하죠. 이런 아들에 대해 이반 일리치는 고마워하면서도 가여운 마음을 동시에 갖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식없고 순진한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이반 일리치도 게라심의 이런 모습에 위로를 받은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오래전부터 진실, 순진함이 가득한 캐릭터나 인물은 많은 소설, 영화 속에 등장해 상처 받고 힘든 이들을 위로해주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진심 어린 위로를 얻고자 하는 것이죠. 하나 이런 사람을 만나기는 힘듭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이런 진실된 인물이 되어주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감정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죽음은 구원에 이르는 길

 

이반 일리치는 고통속에서 괴로워하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삶에 대해 후회, 원망, 의문을 품다가, 죽음이 임박해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이반 일리치가 구멍 속으로 굴러 떨어져 빛을 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빛을 발견한 바로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여태 잘못 살아왔으며, 아직은 이 잘못된 삶을 바로잡을 기회가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반 일리치는 죽기 전에서야 자신이 인생을 잘못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가족들에게 말합니다. "데리고... 나가..., 안됐어..., 당신도..." 그는 용서해달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입에서는 "용기 내줘"라는 엉뚱한 말이 나옵니다. 

 

이반 일리치는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고통에서 해방됩니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는 가족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용서를 구한 순간 그의 마음속에 박혀있던 가시가 빠지게 됩니다. 

 

삶은 후회로 가득찬 수족관을 헤엄치는 것과 같습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전전긍긍하며 멋지게 치장한 물고기가 되어 수족관을 헤엄치는 것이죠. 죽는 순간이 돼서야 이런 것들이 다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살아가는 순간에는 절대 깨닫지 못할 생각과 감정들을 죽기 전 찰나의 순간이 되어서야 알게 되는 것이죠. 

 

이반 일리치가 구한 용서는 가족에 대한 자신의 용서이기도 할 것입니다. 자신을 냄새나는 존재로 취급했던 가족들, 그러나 그는 깨달음을 통해 가족들의 이런 태도들 이해하게 되고 더 나아가 이런 행동들을 용서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매일 마주하는 죽음

 

사람은 누구나 삶을 살아가며 죽음을 마주합니다. 그리고 죽음과 함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멀쩡히 잘 지내고 있지만 내일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죠. 

 

이반 일리치가 죽기 전 구했던 용서를 살아있던 때 가족에게 구했더라면 그의 삶은 더욱 행복해졌으리라 생각됩니다.

개개인은 모두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과정에서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기도 하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고 마음에 묻어두기도 하죠. 

 

용서하지 못할 잘못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도 늦기전에 자신의 잘못을 말하고 용서를 받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혹여 지금 이 글을 읽는 이 순간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문자 한 통을 보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반응형